한반도 자생식물이 근대적 방법으로 채집되어 서구 식물학계에 알려진 것은 19세기 중엽 이후의 일이다. 1854년 프러시아 해군 제독 Alexander Schlippenbach는 한반도 동해안을 측량하는 과정에서 채집한 식물을 네덜란드의 F. A. W. Miquel에게 보냈으며, 이 표본들에 기초하여 버드나무(Salix koreensis Anderss.)와 철쭉(Rhododendron schlippenbachii Maxim.)이 기재되었다. 이후 영국의 R. Oldham과 A. W. Carles, 일본의 Y. Hanabusa와 같은 비전문가들의 채집이 있었고, 이들의 이름은 대나물(Gypsophila oldhamiana Miq.), 분꽃나무(Viburnum carlesii Hemsl.), 금강초롱(Hanabusaya asiatica Nakai)의 학명에 담겨 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프랑스 선교사인 R. P. U. Faurie (쥐오줌풀, Valeriana fauriei Briq.), E. J. Taquet (해변취, Saussurea taquetii Lev. & Vant.), 일본의 T. Uchiyama (그늘취, Saussurea uchiyamana Nakai)에 의해 식물채집을 목적으로 하는 본격적인 활동이 시작되며, T. Nakai로 대표되는 일본 학자들에 의한 식물분류학 연구가 이루어지게 된다.
19세기 중엽에서 20세기 중엽에 걸친 100년 동안의 채집품과 그에 근거한 종 인식은 한반도 근대 식물 연구의 기초가 되었으며, 이들 분류군에 대한 현대적 검증은 지금 우리의 몫으로 남겨져 있다. 이 같은 인식에서 초기 연구자들의 채집 행적 및 채집품은 중요한 기초자료가 되며, R. P. U. Faurie (Chang et al., 2004), T. Nakai (Kim et al., 2006), T. Uchiyama (Kim et al., 2007), T. Ishidoya (Chang and Chang, 2010), T. Mori (Kim et al., 2012), G. Koidzumi, J. Ohwi, S. Kitamura (Chang et al., 2013) 등의 채집 일정에 대한 상세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연구들은 주로 문헌에 인용된 표본 및 표본관(TI와 KYO) 소장 표본의 라벨 정보에 근거한다. 강원대 이우철 교수는 1994년 연구년 동안 TI 소장 한반도 표본의 이미지 및 라벨을 조사하였다. 이상의 선행 연구로 축적된 한반도 고표본 기초정보 DB는 약 30,000건에 이른다. Im et al. (2016)은 도쿄대학 표본관에 미동정 상태로 보관되어 있는 한반도 고표본을 조사하여 기존의 고표본 DB에 추가하였다. 본 연구는 도쿄대학 소장 미동정 한반도 고표본을 발굴하여 기존의 고표본 DB를 확장 및 보완하는 데에 목적이 있다.
재료 및 방법
2018년 8월 5일에서 8월 25일까지, 2019년 2월 11일에서 2월 28일까지 도쿄대학 박물관에 체류하면서 동정 및 라벨 작업을 하고, 중복채집품(duplicate)을 확보하였다. 익숙하지 못한 분류군은 도쿄대 표본관에 소장되어 있는 기동정 표본을 참조하여 동정을 진행했다. 생식기관이 없는 불완전한 표본의 경우 속수준의 동정을 했다.
결과 및 고찰
최근 확인된 TI의 미동정 한반도 고표본
도쿄대학 표본관의 미동정 한반도 고표본은 이름이 알려진 식물분류학자 및 채집자의 표본이 대부분으로, T. Nakai와 T. Uchiyama의 표본이 주를 이루었으며 일부 T. Mori와 T. Ishidoya의 표본이 들어있었다. 미동정 고표본 중에는 비전공자인 일반인들에 의해 채집된 표본들도 있었으며, 이 표본들은 문헌 정보에도 인용되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중에는 구한말 일본 공사를 지냈던 Hanabusa Yoshimoto (花房 義質)와 같은 유명인(Fig. 1C)은 물론 Tsuyama Toshizo (津谷 俊三)와 같은 무명의 공무원(Fig. 1D) 등이 있었으며, 곤충학자인 석주명선생이 함흥에서 채집한 약 100종의 식물표본도 도쿄대학에 소장되어 있었다. Saito Siroji (齊藤 四郞治)의 채집품처럼 체계적으로 여러 지역에서 많은 식물을 채집한 경우에 대해서는 선행연구에서 소개한 바 있다(Im et al., 2016).
고표본 라벨의 채집지 기록은 당시의 한반도 현지 지명 발음을 일본글(카나) 또는 알파벳으로 표기한 것이 일반적이었다. 한자로 표기된 지명 중에도 현재의 지명과 다른 경우가 있어서 채집지를 특정하기 힘들었으며, 북한 지역은 새롭게 개명된 곳이 의외로 많아서 일본 연구자들은 물론 우리도 고표본의 라벨 정보를 이용하기 쉽지 않은 경우가 있었다. 일반적으로 고표본에는 손으로 쓴 라벨이라도 들어 있지만, 때로는 라벨이 없이 채집지 또는 채집일만 신문지에 수기되어 있는 경우도 있었다(Fig. 1A, B). Fig. 1A는 Saito Siroji (齊藤 四郞治)의 채집품으로 표본 뭉치의 표지 신문에 “1926년 6월 19일 조선 Kannonsan (観音山)”으로 수기되어 있었고, 첨부된 라벨에 Bentenzan (弁天山)으로 표기되어 있었다. 일본에서는 관음보살을 변천(弁天)으로 부르기도 하므로 이들 표본이 채집된 Kannonsan (観音山) 또는 Bentenzan (弁天山)은 거제도에 있는 관음사 뒷산인 옥녀봉을 지칭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Fig. 1B는 신문지 여백에 “伽 8, 12”라는 수기 이외에 어떤 정보도 제시되어 있지 않았다. 기존 고표본 DB에서 “伽 8, 12”를 주요어(key word)로 검색한 결과 이들 표본은 T. Nakai가 1919년 8월 12일 가야산에서 채집한 표본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한반도 고표본 확보 작업은 기존 라벨(일문 라벨)이 있는 경우에도 우리나라 현재 지명을 특정하여 영문 라벨을 새로 만든 다음, 동정을 하는 수순으로 진행하였다. 이번 조사에서 확보된 한반도 고표본 중에는 기존의 고표본 DB에 올라있지 않는 표본이 상당수 있었으며, 그 중 Ikuma Yoichiro (生熊与一郞)의 채집품은 한반도 북동지역에서 체계적으로 채집되었다.
Ikuma Yoichiro (生熊 与一郞)의 채집품
Y. Ikuma는 곤충학자로『응용곤충학교과서, 1904년』, 『동물표본 및 모형제작법, 1913년』과 같은 곤충학 저서를 남겼으며, 석주명 선생처럼 곤충조사를 하면서 식물채집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Y. Ikuma의 채집품중 일부는 기존 고표본 DB에 이미 등재되어 있으나, 표본 정보에 두 군데 오류가 있는 것으로 보였다. 먼저 채집자 이름이 Ikumatsu I.로 되어 있는데, 이는 고표본 라벨 정보를 DB화하면서 채집자의 성(生熊)을 읽고 표기하는 과정에서 생긴 착오로 생각된다. 다음으로 채집년월이 일부는 1913년 8월로 나머지는 1914년 8월로 되어 있는데, 표본에 적힌 원정보를 라벨화하는 과정에서 오류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Fig. 1E, F). Fig. 1E는 무두봉, 백두산, 신민둔에서 채집된 표본 뭉치의 표지로서 신문지 왼쪽 여백에 신민둔 8, 14로 표기되어 있고, 다른 필체로 1914(3)로 표기되어 있어서 1914년(혹은 1913년) 8월 14일 채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기존 고표본 DB의 Y. Ikuma 채집품은 1913년과 1914년 모두 7월 31일부터 8월 23일까지의 기간 동안에 무산, 농사동, 백두산, 혜산진 지역에서 채집된 것으로 두 해에 걸쳐서 채집되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Y. Ikuma가 TI로 보낸 채집품의 일부를 도쿄대 연구자들이 표본화하는 과정에서 기재 오류가 생긴 것으로 추정된다. Fig. 1F는 미동정 상태로 대지에 올려진 고표본의 라벨인데, 아래쪽 표본은 “咸南 惠山鎭 Aug. 23. 1914. 中井猛之進”, 위쪽 표본은 “咸南 茂山 農事洞 Aug. 8. 1913. 生熊与一朗”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 라벨의 필적은 양쪽 모두 T. Nakai 박사의 글씨체로 추정되는데, T. Nakai 박사의 기존 조사 행적에 의하면 Aug. 23. 1914.에는 함북 회령에서 채집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더욱이 위쪽 표본에는 채집자명을 中井이라고 썼다가 中을 生으로 고치고, 井 대신에 熊을 기입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아래쪽 표본의 라벨 정보는 잘못된 것으로, 이 표본은 T. Nakai라 아니라 Y. Ikuma의 채집품일 가능성이 높다. 신문지의 채집 연도(1914 혹은 1913)와 TI 라벨의 기재 내용, 그리고 기존 고표본 DB의 Y. Ikuma 표본 중에 1914년보다 1913년 채집품이 많은 점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본 연구에서는 Y. Ikuma 채집품의 채집년도를 1913년으로 추정했다.
이번 연구에서 확보된 Y. Ikuma의 채집품은 당시의 행정구역으로 함경북도와 함경남도 지역에서 채집되었는데, 해방 후 백두산과 혜산진 지역이 양강도로 개편되었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함경북도와 양강도 지역에 해당한다(Fig. 2A). 이 표본들은 1913년 8월에 청진(淸津)–차유령(車踰嶺)–무산(茂山)–강구(江口)–농사동(農事洞)–무봉(茂峰)–무두봉(茂頭峰)–백두산(白頭山)–최가령(崔可嶺)–혜산진(惠山鎭) 지역에서 채집되었다(Fig. 2, Table 1). 이 지역들은 한반도의 대표적인 고산지대(백두산-개마고원지역)의 일부로서 한대-아한대식물의 분포중심지이다. 주로 백두산에서 촬영된 희귀 북방계식물의 사진은 국내 도감에 많이 실려 있지만, 국내에 북한산 표본이 거의 없는 현재 상황에서 이 연구에서 확보된 중복채집품(duplicate) 및 라벨 정보는 한반도의 식물상 및 식물분포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기초자료로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표본으로 확보된 Y. Ikuma의 채집품은 60과 177속 240종(미동정 3분류군 포함)으로 정리되었다(Appendix 1). 부록에 제시된 목록은 과명, 학명, 국명, 채집지의 순으로 배열했으며, 채집지 번호는 Table 1의 채집 날짜와 동일하다.
중요식물
이번에 추가로 확보된 Y. Ikuma의 채집품 중 특히 의미있는 식물들은 백두산과 개마고원을 중심으로 한 고산지대에 제한 분포하는 식물들이다.
1. 개통발(Urticularia intermedia Hayne (DC.) J. R. Grant) (Fig. 3A)
개통발은 땅속으로 벋는 줄기에 포충낭이 달리며, 호생하는 잎은 주축이 없이 몇 번 차상분지 하는 점이 통발 또는 들통발과 구분되는 특징이다. Y. Ikuma의 표본은 최가령에서 채집되었는데, 생식기관이 없는 불완전한 상태이지만 여러 번 차상분지하는 잎이 호생하고 있어서 개통발로 동정했다. 북반구의 아한대와 냉온대를 중심으로 넓게 분포하는 수생식충식물로 우리나라에는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고산지대에 자라며, 강원도 대암산에서도 확인되었다.
2. 긴잎별꽃(Stellaria longifolia Muhl. ex Willd., Fig. 3B)
별꽃속 중 가늘고 긴 선형의 잎을 가진 분류군은 실별꽃과 긴잎별꽃이 있으며, 긴잎별꽃은 줄기 상부 능선에 미세한 돌기가 발달하는 특징이 있다. 최가령에서 채집된 이 표본은 잎폭이 3–4 mm로서 기재문에 비해 넓지만 줄기 상부 능선에 미세한 돌기가 있어서 긴잎별꽃으로 동정했다. 북반구 고위도지방에 널리 분포하는 전형적인 주북극요소 식물로 한반도에는 백두산과 개마고원지역에 자라며, 경기도 수원 부근에도 분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3. 육지꽃버들(Salix viminalis L.) (Fig. 3C)
육지꽃버들은 잎이 선상 피침형으로 10–15 cm×0.3–1 cm이고, 아랫면에 은색 융모가 밀생하며, 자방이 밀모로 덮여 있고, 암술머리는 옅게 둘로 나뉘는 특징이 있다. 최가령에서 채집된 이 표본은 생식기관이 없는 불완전한 상태이지만, 아랫면에 은색 융모가 밀생한 긴 선상피침형의 잎을 기준으로 동정했다. 극동러시아, 중국 동북지방에 분포하며, 한반도에는 압록강과 두만강 주변 지역에 자라고 국내에는 해방 전에 채집된 표본이 몇 점 있다.
4. 쌍잎난초(Neottia pinetorum (Lindl.) Szlach.) (Fig. 3D)
한 쌍의 잎이 대생하는 독특한 외관의 지생란으로 히말라야, 중국 동북지방, 극동러시아에 분포한다. 한반도에는 백두산과 개마고원지역의 냉온대 침엽수림에 주로 자란다. Y. Ikuma의 채집품 중에는 강구와 최가령에서 각각 채집되었다.
5. 유령란(Epipogium aphyllum Sw., Fig. 3E)
잎도 없고, 엽록소도 없는 부생란으로 유라시아의 냉온대 및 아고산대 침엽수림에 주로 분포하며, 한반도에는 백두산을 중심으로 자란다. 일본의 유령란은 절멸위기종 1B류(EN)로서 Hokkaido에서 Chubu 지방의 아고산대로 점점이 분포하지만, 근연종인 E. roseum (D. Don) Lindl.은 반대로 열대지방에 기원하여 Kyushu를 거쳐 Kanto 지방까지 북상하는 분포양상을 보인다(Yamamoto et al., 2017).
6. 털기름나물(Libanotis coreana (H. Wolff) Kitag (Fig. 3F)
털기름나물은 유라시아대륙에 분포하며, 한반도에는 백두산과 한라산에 격리분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가는잎방풍(Libanotis seseloides (Fisch. & C. A. Meyer. ex Turcz.) Turcz.)에 포함시키는 견해도 있다. 혜산진에서 채집된 이 표본은 전체에 털이 있고, 잘 발달된 엽초와 총포가 특징적이다.
7. 주북극요소(circumpolar element) 식물
유라시아와 북아메리카의 한대 및 아한대지역에 넓게 분포하는 대표적인 북방계식물로 한반도의 경우, 백두산과 개마고원 지역이 주분포지이다. 중부 이남에는 설악산, 한라산 등 고산지대에 격리분포하는데, 빙기에 남쪽으로 세력을 확장했다가 간빙기의 온난화에 의해 고산지대에 유존하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Y. Ikuma의 채집품 중에는 홍월귤(Arctous ruber (Rehder & E. H. Wilson) Nakai), 개병풍(Astilboides tabularis (Hemsl.) Engl.), 독미나리(Cicuta virosa L.), 닻꽃(Halenia corniculata (L.) Cornaz), 이삭단엽란(Microstylis monophyllos (L.) Sw.), 애기사철란(Goodyera repens (L.) R. Br.), 나도범의귀(Mitella nuda L.) 등이 이에 해당한다.